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넬슨 만델라 (문단 편집) === 대통령 만델라 === [[파일:external/latimesphoto.files.wordpress.com/nelson-mandela1994-6_drev7igy.jpg]]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당시 많은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사회, 경제적 영향력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만델라가 사망하였을 때도 일각의 우려와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만델라는 자신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P. W. 보타]] 전 대통령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되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그런 말을 꺼냈겠지만, 만델라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에는 찬 바람만이 오가게 되었다. 이후 [[1998년]], 만델라가 재임 중이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는 거절을 해버렸다. 이후 [[백인우월주의|"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 라는 망언을 하다 2006년 노환으로 [[자업자득|죽었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cdn.newsday.com/image.jpg]]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이후 이 스토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9년 개봉 영화 인빅터스에서 영상화되었다. 만델라 역은 [[모건 프리먼]],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역은 [[맷 데이먼]]이 맡았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서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많이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백인층 기득권도 상당수 남겨놔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 문제 대처에도 좋진 않은 성적을 보이다 결국 권력다툼에 밀려 2009년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불명예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바보같은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퇴임 이후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당내 정적 겸 후임 [[제이컵 주마|주마]]가 각종 스캔들로 욕을 먹으면서 평가가 전보단 나아진 편. 하여튼 그럼에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까지 2020년대에도 ANC가 쭉 집권하고는 있다.]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가 된 영웅|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많은 [[로버트 무가베|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원래 외국 정상이 방한하면 서울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게 관행이다.]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사망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하필 그때가 부인과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반대파의 극심한 저항, 정적 용서,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http://news.bbc.co.uk/2/hi/asia-pacific/1216234.st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